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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20주년 프리미엄 화장품 3LAB 에리카 정

‘이젠 나눔 인생으로 살아야죠’


인터뷰·글 : 김지원 에디터


라프레리, 라메르, 시슬리 등과 함께 글로벌 프리미엄 화장품 라인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3LAB이 창립 20주년을 앞두고 있다. 세계적인 뷰티 전문 매거진 얼루어(Allure)에 의해 최고의 뷰티 제품(The Best of Beauty Awards)으로 연이어 선정되고, 전세계 16개국에서 놀라운 성장률을 기록하며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는 3LAB. 창립자 에리카 정(66)은 3LAB을 스무 살 된 자식에 비유했다. “광고 하나 없이 제품력 하나만으로 이만큼 키워 놨으니 제 할 일은 다 한 것 같아요. 제가 죽고 나서도 500년, 1000년 갈 브랜드로 더 크게 성장하길 바랍니다.” 목표를 향해 정신없이 달려온 레이스에서 조금씩 내려올 준비를 하고 있는 에리카 정 3LAB 창립자는 이제 세상을 살피며 ‘나누는 인생’을 살기 위해 준비했던 것들을 하나씩 실행해 가고 있다. 부모님 덕으로 시작해 평생을 뜻대로 계획대로 살아왔기에, 가진 것들은 사회에 환원하며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데 남은 시간을 쓰고 싶다고 했다. 그녀의 말과 생각의 곳곳에는 마지막 순간까지 철학적으로 사유하며 예술가로서 삶을 통찰했던 아버지 ‘극재(克哉) 정점식 화백’의 정신이 든든하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2022년을 마무리하는 12월이다. 열정으로 생을 살아내고 삶에 있어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찰하는 인생 선배의 담백한 조언과 함께 새해를 준비해 보는 건 어떨까? 3LAB 창립자 에리카 정 대표를 맘앤아이 스튜디오와 그녀의 위켄드 하우스에서 만났다.

 

어린 시절 환경이 에리카 정 대표님의 가치관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대구에서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어요. 제가 어릴 때만 해도 한국 문화는 여자를 경시하는 풍조가 있었는데, 저는 집에서 여자를 무시하는 말을 듣거나 비슷한 경험을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어머니는 ‘여자도 본인 직업이 있어야 한다’고 항상 말씀하셨고, 아버지도 진보적 가치관을 갖고 계셔서, 여성을 존중하고 ‘여자라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을 심어 주셨어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제 능력을 펼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아요. 학창 시절 장래 희망란에 교수, 피아니스트를 써냈어요. 그때만 해도 여학생들 대부분은 현모양처를 써냈는데, 전문직을 희망한 저를 친구들이 신기하게 봤던 기억이 나네요.



아버지이신 극재 정점식 화백은 한국 현대 미술을 이끈 선구자이자 추상화의 거목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에리카 정 대표님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아버지는 화가이기도 하셨지만, 문학가이자 철학자이셨어요. 당시 대구는 서울 다음으로 컸던 제2의 도시였는데요. ‘교육과 문화의 도시’이다 보니 아버지의 존재가 매우 유명하셨어요. 그 당시 미술 교과서도 아버지가 집필하셔서 전국의 학생들이 아버지가 만드신 교과서를 보며 공부를 했고, 계명 대학교에서는 아버지를 모셔가 미술대학을 설립했습니다. 미대 학장을 지내시며 평생 교수직에 계셨던 아버지는 TV만 틀면 나오시고는 하셨어요. 그걸 보며, 언젠가 아버지처럼 돼야겠다 생각하며 자랐어요. 아버지라는 좋은 롤 모델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제가 있을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해요.



With love of my life, 평생의 친구인 3살 터울의 친 언니 정명주와 함께


소녀 시절은 어땠나요?

저보다 뛰어난 친구들을 보면 질투하지 않고 ‘나도 저렇게 돼야지’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제가 유년 시절을 보낸 대구는 6.25전쟁의 피해가 없어 부유한 집이 많았는데, 특히 제 베스트 프렌드가 외제차를 타고 다니며 저택에 사는 모습을 보고는 나도 부자가 돼야겠다는 꿈을 가지기도 했었어요(웃음). 사춘기 때도 남의 뒷담화는 하지 않고, 다른 친구의 비밀을 절대 지켜주는 의리 있는 여학생이었던 것 같아요.



여성스러운 외모와 달리 대장부적인 기질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꿈이 컸어요. 대학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았어요. 더 크게 성공하고 싶었고, 제 꿈을 펼치기에 당시 한국은 너무 작다고 느껴서 미국 유학을 결심했어요. 국비 장학생으로 유학간 오빠들에 비해 공부를 못한다는 이유로 부모님이 반대하셨는데 아버지의 인감도장을 훔쳐 서류에 찍고 유학길에 올랐죠. 그렇게 일리노이주에 있는 리브럴 아트 컬리지(liberal arts college)인 어거스타나(Augustana)에서 첫 미국 생활을 시작했어요. 이후 뉴욕에 와서 정치학 석사 과정을 밟는 중에 딸의 혼기가 걱정됐던 어머니의 부름을 받고 한국으로 들어갔어요. 그러던 어느 날 오빠가 신문을 내밀며 삼성에서 외국 학위 소지자, 영어 특기자를 채용한다는데 한번 가보라고 했어요. 당시 6명을 뽑는데 550명이 지원했어요. 취직 생각이 없었지만, 경쟁에서 밀렸다는 말은 듣기 싫어 악착같이 올라갔어요. 결국 신라 호텔에 공채로 뽑혀 대리로 입사했습니다. 그렇게 회사 생활을 시작하고서 한번은 부장님께 “얼마나 근무하면 계열사 사장이 될 수 있어요?”라고 물었어요. 그 당시 삼성에는 26개의 계열사가 있었거든요. 깜짝 놀란 부장님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시면서 “정대리가 사장하게?”라고 물으시더라고요. 저도 벌떡 일어나서 “못할 거 있어요?”라고 했죠(웃음). 그때 이 나라는 아직도 여자를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회사를 나왔어요. 미국에서 대학원을 마치지 못한 상태였기에 석사를 끝내야 겠다는 생각으로 연세대 국제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하던 중 동국 방직 뉴욕 지사장직을 제안 받고 뉴욕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만약에 교수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면 또 다른 인생을 살았을 것 같다고 말씀하셨어요.

저희 4남매 중 저를 제외한 세 명 모두가 아버지처럼 교수가 됐어요. 제 외할아버지는 거상이셨는데, 저는 외가 쪽을 닮은 것 같아요. 교수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아마 동대문, 남대문에서 시작해 패션 분야에서 더 빨리 성공했거나, 정치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적성에 맞지 않는 공부를 하느라 시간을 많이 낭비하지 않았나 싶어요.(웃음)



결혼 후 남편과 함께 뷰티 업계에 뛰어들면서 3LAB이라는 화장품 브랜드를 세웠고 그야말로 성공 신화를 썼습니다. 사업을 하면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원칙이 있다면?

제가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비즈니스는 자기가 좋아한다고 해서 더 잘하는 것도 아니고, 관심이 없는 분야의 일을 한다고 더 못 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단 성공을 위한 서너 가지 중요 요소는 있어요. 첫째, 계획이 있어야 하고 둘째, 계획을 실행해 나갈 열정이 있어야 하며 셋째, 일을 집중력 있게 처리해야 하며 넷째, 남들과는 다른 창의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 네 가지 요소를 갖추고 더 효율적으로, 더 큰 효과를 얻기 위한 방법을 끊임없이 연구하는 것. 이것이 사업하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결혼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요?

결혼은 두 사람이 만나 서로 맞춰가면서 사는 거라고들 말하죠.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한 책임을 완수해야 좋은 결혼 생활이 돼요. 그런데 저희 시대에는 무조건 참고 살다 화병이 생긴 분들을 많이 봤어요. 저는 결혼을 인생의 결승점을 향해 두 사람이 손잡고 함께 뛰는 달리기에 비교하는데요. 한 사람이 자꾸 라인을 이탈해 다른 방향으로 가려 한다면 굳이 그 사람을 붙잡지 말고 목표를 향해 결승점까지 혼자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가정불화를 조장하려는 건 절대 아니고요. 화병이 나면서까지 힘들게 살 수는 없다는 거죠.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한국 여성분들의 한을 풀어주는 클래스를 열고 싶어요. 내 속에 화가 무엇 때문인지, 어떻게 화를 없앨 수 있는지, 스트레스나 화를 풀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함께 나누는 시간을 마련하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한 번 살려고 태어난 인생에서 뭐가 가장 중요한 것인지 생각해 봐야지요.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에게도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고요?

공부가 다는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모든 아이에게는 각자의 재능이 있어요. 아이보다 더 일찍 삶을 살아본 멘토로서 엄마가 아이의 재능을 미리 알아보고 더 크게 키울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공부와 학벌에만 너무 집착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학교를 나와도 사회성이 떨어지는 안타까운 경우를 많이 봤어요. 아이의 타고난 성향에 맞게 잘 서포트 하는 것이 중요해요. 자기의 재능을 잘 발휘해 본인에게 의미있고 행복한 생을 살고, 나아가서는 다른 이에게도 도움이 된다면 그게 가장 성공한 삶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NYU를 졸업하고 로스쿨에 가려던 하나뿐인 아드님의 출가도 막지 않으셨던 걸로 압니다. ‘뷰티 앤 부디스트’라는 책을 쓰기도 하셨는데, 종교는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시나요?

종교는 집안의 문화라고 생각해요. 부모님이 교회를 가시면 자식들이 가는게 당연한 문화이듯이 저는 기독교 사상의 학교들을 오래 다니며 자연스레 기독교 문화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나이가 들어서 종교를 선택한 케이스죠. 신앙적인 종교가 아니라 인생의 답을 찾기 위해 불교를 책으로 먼저 접했고 불교를 통해 마음 수양을 하고 정신 수준을 높이기 위해 정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욕심과 욕망 때문에 한순간에 몰락의 길을 걷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욕심이 없다면 무언가를 이루기도 힘들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물질적인 것만 추구해서는 만족할 줄 모르는 끝없는 허덕임에 빠지게 되죠. 불교 경전에 ‘소욕지족(少欲知足)’이란 말이 있습니다. 적은 것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돈이나 물질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고, 죽으면 두고 가야 할 것들이지만, 내적 수양, 정신 수련은 죽어서도 갖고 가는 거라 생각해요. 제가 명상하고 책을 읽으며 정신 수련을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이성과 감성의 조화를 이루는 삶을 추구하고, 돈을 벌더라도 본인뿐 아니라 많은 이를 위해 나누는 삶이 더 가치 있고 행복한 삶이라 생각합니다.



나누는 삶을 위해 하나씩 계획했던 것들을 실행해 나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예전에는 자선 사업을 하는 부자들을 보면 위선적이라고 생각했는데요. 나이가 드니 진심으로 제가 가진 것을 나누고 싶더라고요. 앞으로 제가 살아가는 목표와 이유가 되는 일을 하다가 생을 마무리하면 그래도 ‘내가 열심히 살았구나’ 생각하지 않을까 싶어요. 일생을 바쳐 본인이 열심히 일해 번 재물은 본인이 귀하고 의미있게 쓰고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첫 번째로 한국에서 아버지의 예술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제1회 ‘정점식 미술상’을 지난 6월 진행했습니다. 미술 창작을 제외한 기획자, 평론가, 연구자 등을 발굴해 시상하는 상이고요. 운영비와 상금을 후원하면서 한국 미술계에 작게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서울에 갤러리를 마련했어요. 아버지의 작품도 전시하지만, 가난한 화가들에게 무료로 본인 작품을 소개할 기회를 마련해 주면서 홍보도 돕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맨해튼에 갤러리를 겸한 명상 센터를 계획 중입니다. 한인뿐 아니라 명상과 내적 수양에 관심 있는 외국인들을 위한 공간으로, 좋은 차를 마시며 철학적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이 되었으면 해요.



인생을 살면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가치와 신념이 있으시다면?

내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게 아니기 때문에 내가 편해지려면 마음 공부를 계속 해야 해요. 항상 ‘바르게 살자’는 신념이 있었어요. 판단의 순간마다 ‘이게 바른지 아닌지’를 먼저 생각했어요. 제가 ‘몰라서’, ‘어리석어서’ 잘못 판단한 일은 있을지언정 바르지 않은 일인 것을 알고 하지는 않았어요. 양심을 어긴다는 것은 스스로를 부정하는 일이잖아요. 저는 기능성 화장품 창업자로서 효과있는 화장품으로 젊음과 미를 지켜주는 약속을 한 사람이니, 제 자신도 needle이나 knife의 도움을 단 한번도 빌리지 않고 제 제품으로만 피부를, 젊음을 유지해야 한다는 철학으로 새로운 원료와 기술을 항상 연구하고 있는 고집스러운 66세의 여자입니다. 저는 자존감과 자신감을 갖고 스스로를 좋아하면서 살아야 떳떳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뒤돌아보면 후회되는 일들도 있으신가요?

예전에는 일에만 몰두하느라 친구들과 많은 시간을 가지지 못했어요. 술은 커녕 커피도 마시지 않고 골프도 안 치는 저를 보며 주변에선 참 재미없게 산다는 말도 많이 하는데요. 친구들과 더 많이 여행을 다니지 못한 게 조금 후회가 되요. 젊을 때는 결과와 목표 지향적인 삶을 살다 보니 행복을 못 느꼈어요. 결과가 나와야 행복한 줄 알았는데. 요즘은 매일매일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지내고 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하고, 먹고 싶을 때 먹고, 가고 싶은 곳을 가는 하루하루가 행복임을 느끼며 살고 있어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으세요?

사람 냄새나는 사람이고 싶어요. 돈만 쫓으며 사업한 사람은 아니거든요(웃음). 사람답게 살기 위해 노력했고 인간 관계를 맺을 때도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살았어요. 내 이익을 위해 인간 관계를 한 적은 없었다는 거. 물론 인간 같지 않은 사람에게는 제 성격이 불 같아서 바른 말을 하기도 했지만요(웃음). 겉으로는 화려해 보일지 몰라도 노는 거에 취미도 없고 놀 줄도 몰라요. 차 마시고 책 보는 게 취미인데요. 앞으로도 내적 수양을 통해 정신적으로 꾸준히 수련하며 즐겁게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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